순간, 1.

  스무 살 중반, 나는 뉴욕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금요일이었고,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들린 모퉁이 빈티지 샵에서 18달러짜리 자켓을 샀다. 금발의 젊고 키가 큰 점원이 노래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름 모를 친절이 어디서든 따라붙었다.

그때는 숨만 쉬어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매일 이만 보씩을 걷고 집에 돌아가면 발이 퉁퉁 부어서 내일은 한 보도 못 걷겠다 생각하면서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맨해튼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길을 잘못 들어 방향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지만 늘 명확한 목적도, 정해둔 도착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오히려 길을 잃는 편이 더 나았다. 내 경험상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으니까.

  걷다 지쳐 잠깐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내 앞으로 어떤 남자가 지칠 줄 모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분수대 주위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책을 읽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며 유난히도 따뜻했던 뉴욕의 오늘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축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어디서 날라왔을지 모를 비눗방울이 눈앞을 낮게 가로질렀다. 걷는 내내 한 번도 귀에서 빼지 않았던 이어폰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흘러나왔다. 한순간 눈앞으로 비둘기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든 순간들이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건 내가 완벽한 조화의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듣고, 보고, 호흡하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 순간. 그 곳에 존재하는 모든 풍경들이, 꼭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이 순간을 맞이하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 분수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을 찍어놓은 한 장의 스틸컷처럼 보였다. 호흡을 멈추고, 순간에 압도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시간을 붙들려 안간힘을 쓰며.

그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언젠가, 내가 이 순간을 죽도록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순간, 2.

  5월의 화창한 봄날, 나는 프랑스의 어느 공원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당시 나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는데, 파리 근교의 조용한 소도시였던 그곳은 시간이 날 때 할 수 있는 일이 산책과 수다를 떠는 일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자주 그 잔디밭을 찾았다. 그날 내게는 풀지 못한 몇 가지 숙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꿈에 그리던 교환학생의 삶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고, 잠깐의 평화가 지나고 나면 홀로 고독의 순간을 견뎌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날도 나는 불안과 우울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걸 그저 멍하니 견디고 있었다. 언어가 내 세계의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외로웠고, 우울했고, 그래서 죽고 싶었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어폰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멜로디에 맞춰 울려 퍼지는 조용한 노랫소리는, 내가 몇 해 전 뉴욕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순간 뉴욕에서 마주쳤던 그 조화의 순간이 기억났다. 그날의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도.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조금 놀랐다. 내가 방금까지 빠져있던 우울과 불안이 시야를 가리고 눈 앞의 광경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강물의 수면이 빛을 받아 흩어지는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명멸하는 그 빛 너머로 하얗고 노란 빛 테두리를 머금은 가로수들,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연인들, 느린 발걸음으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인생은 아름다웠다. 그랬다. 내가 죽기를 결심하기에 삶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노래가 불러일으킨 영화적 시간의 연상 속에서, 나는 다시 그 생생하게 빛을 내는 삶의 아름다움을 내 기억 속 깊숙이 새겨 넣었다.

순간, 3.

  풀어야 할 문제들을 차 안 가득 싣고 달리던 늦은 밤의 도시. 유난히 날이 좋아 에어컨을 끄고 굳게 닫혔던 창문을 내렸다. 무더웠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고 있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달리는 차 주위를 빠르게 비껴 나가는 공기가 손바닥을 스치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아마 이 순간도 스쳐 지나칠 바람처럼 무상한 시간 속에 허물어져 버리겠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은 랜덤 플레이리스트에서 오래전에 자주 듣던 영국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울한 목소리와 함께 빛나는 생의 감각을 노래하는 경쾌한 멜로디의 그 노래. 나의 뉴욕, 젊은 날의 고독을 함께 했던 나직한 울림. 낮게 읊조리는 듯한 노래를 어느 날의 독백처럼 따라 부르며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던 그 밤, 이제는 오래되어 누렇게 번진 필름 사진처럼 빛바랜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의 뉴욕, 거리의 사람들, 사건들, 낯선 친절들, 예상치 못한 친밀감, 애틋함, 매일의 산책, 수면의 일렁임, 만남과 떠남, 밤과 낮, 새벽, 그 모든 것들을 이루고 있는 작은 순간들에 대해.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그 작은 빛의 순간들로 채워진 삶은 아름다웠다. 단지 내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삶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빛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더 뒤돌아보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빛의 순간들을 주워 담고, 일상의 구멍을 그 빛들로 구석구석 채워 넣는 일. 절대 무너지지 않을 벽을 쌓아 올리는 일. 빛나는 생의 감각을 몇 번이고 다시 새겨넣는 일. 무너지는 일 없이, 돌아가는 일 없이, 그 빛을 따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 문장들 #작은, 아름다운, 순간들

• 끔찍한 고백이지만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p.115

• “지금 이 순간, 거리의 악사가 손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멋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p.49

• 세상은 아름답다. 평소엔 일상 아래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빛과 그림자, 미세한 온도차, 염분과 지방의 절묘한 균형, 소리와 박자의 기적 같은 조합 등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명확해질 때가 있다. 이곳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테라오 겐, p.110

• 당신이 ‘오늘’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소중한 게 아니라 그것이 ‘오늘’이라는 이유만으로 눈부시고 빛나는 하루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사소한 아름다움들이 빛나는 축복의 시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정여울, p.276

• 슬픔은 우리 생각보다 가벼울 수 있다. 어쩌면 꼭 용감무쌍한 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삶에서 흔히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작은 것들의 위대한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할 수도 있다. 어쩌면 구원은 보기보다 가까울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저 손을 뻗어서 문을 닫는 것뿐이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p.352

💿 I feel I’ve met you before

발행되지 않았던 10월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사’에 이어 ‘내가 좋아하는 멜로디’나 ‘장르’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호, 불호를 넘어서는 이야기할 만한 알맹이가 내겐 없었다.

’애초에 글쓰기를 시작할 때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썼던 거니까, 이렇게 쓰면서 공부하고 알아가면 되지‘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지식이 있는 상태로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막상 11월이 되니 오만한 생각이었지 않나 싶다. 전문가가 전문가인 덴 다 이유가 있지 않나. 11월 동안 음악과 관련해 아무 지식도 쌓지 못한 내가 그나마 잘 아는 테마를 가지고 글을 쓰자면 앨범 커버가 있겠다.

원하는 모든 걸 살 수 없던 청소년기에는 주로 좋아하는 ‘가수’가 구매 기준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적고, 노래가 별로여도 팬심은 남으니까. 그 시절 수많은 앨범 중 이쁘다고 생각한 최초의 앨범은 2007년 발매된 에픽하이의 <Remapping the human soul>이다. 뭔가 모를 심오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 같은 커버를 열면, CD 자체의 반짝이는 은색과 검은색의 패턴이 새겨진 CD가 두 장이 들어있다. 그 심플하고 강렬한 이미지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이 앨범을 닳도록 들으면서 ‘이렇게 멋진 디자인의 앨범은 노래도 좋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내 관심과 진로가 시각적인 것에 집중되면서 ‘앨범 커버’라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었다. 특히 대학에 입학하고 음원 사이트로 노래를 듣기 시작하면서 앨범 커버를 더 쉽게 훑을 수 있게 되었다. 한눈에 매력적인 앨범 커버들을 찾다 보니, 가수의 이름과 얼굴이 중요한 대형 기획사나 유명 가수의 앨범보다는 내 취향의 커버 아트거나 동경하는 디자이너의 작업물, 호기심을 자극하는 앨범 커버를 가진 인디 가수들의 노래를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노래가 좋아 앨범 커버가 더 좋아 보였는지, 앨범 커버가 마음에 들어 노래가 더 좋게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멋지다고 생각한 앨범 커버는 노래도 좋았다. 멋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왜 시각적인 감각도 완벽한 건지. 그런 걸 찾고 듣는 동안 나도 멋진 사람들 사이에 껴있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아직도 내게 그런 느낌을 주는 취향의 커버 디자인 몇 가지와 그 이유를 공유하고 싶다. 당연히 노래도 모두 추천하는 앨범들이다.

Getz/gilberto, Stan Getz & Joao Gilberto, 1964

보사노바, Stan Getz, Joao Gilberto 중 아무것도 모르는데 오로지 앨범 커버 때문에 들었고,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정석적인 레이아웃 구성과 아름다운 비율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데 노래도 그렇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앨범은 나에게 따뜻한 파란색의 느낌이라 파란 버전도 있으면 좋겠다.

트램폴린, This Is Why We Are Falling For Each Other, 2011

앨범 커버를 이루는 꼴라주, 패턴, 빈티지한 색감과 레이아웃 모두 멋지고 감각적이다. 이 앨범 역시 앨범 커버가 한 번씩 생각나서 노래를 듣는다.

빈지노, 24:26, 2012

24살부터 26살까지 앨범 준비와 학교생활을 하며 사막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고 한다. 침 뱉기 일보 직전의 낙타가 그려진 커버가 그런 심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빈지노의 다른 앨범들은 앨범 아트보다 노래나 뮤직비디오가 더 기억에 남는데, 이 앨범만큼은 다른 것보다 앨범 커버가 늘 먼저 기억난다.

혁오, 사랑으로 - EP, 2020

노상호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커버 아트로 사용하던 이전 앨범들과 다르게 사진을 커버로 사용한 첫 앨범이다. 덜어내는 데 집중했다는 인터뷰처럼 담백한 디자인의 앨범 커버로 이쪽이 더 내 취향이다. 정갈한 텍스트와 달리 시들고 꺾인 화단의 식물 사진. 혁오라는 이름이 없었어도 무조건 클릭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 79층의 찬스

“여러분! 아까도 계속 말했듯이 도착해서는 함부로 말 걸거나 하면 안 됩니다! 신체 접촉을 하거나 이상한 물건을 주워와서도 안됩니다! 아시겠죠? 돌발행동하지 말란 말이에요! 도착하면 우리는, 모두, 함께 다니는 거예요, 함께.”

우리, 함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상대방 쪽으로 원을 휘휘 돌린다. 하지만 이 절절한 외침은 유감스럽게도 금세 맞은편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 그래 됐어요…….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을 맞춰 입고 선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을 직면하여 들떠있다. 그들의 아침은 분주한 설렘으로 꽉 들어차선 다른 이야기가 낄 틈이 없어 보였다.    

또각또각 누군가의 구두굽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미소와 다부진 신체에서 나오는 아우라 때문인지 일동이 숙연해진다. 그를 감싸고 있는 이상한 카리스마는 어쩌면 품위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어도 너무 긴 우스꽝스러운 모자와 자주색 양복, 아니면 오른손에 쥔 나무 지팡이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구두굽과 지팡이는 제각기 박자를 만들며 다가온다. 아이들은 기억 어딘가 광고에서, 기사에서, 전단지에서 봄직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홍해처럼 양옆으로 쫙 갈라선 아이들 사이를 그는 왼쪽 오른쪽 군데군데 고루 시선을 주며 걸어간다. 

“여러분, 반가워요. 오늘 여행의 책임자로서 제가 함께 합니다. 원래 이런 학생들이 참여하는 행사에는 함께 하고 있어서. 별일 없을 거고, 또 없길 바라며. 뭐, 별일 없을 거예요.”

걸어 다니는 신화가 웃으며 말했다. 찬스는 이 도시에 사는 모두가 알만한 악착같은 전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작은 지하였으나 지금은 상위층에 자리를 마련한 살아있는 신화 같은 존재. 그의 엄마는 종종 지하와 상층을 물과 기름이라는 단순한 현상으로 말하곤 했다. 원래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데, 그걸 순간적인 힘으로 막대를 갖고 돌려버리면 아주 잠깐 섞일 때 있잖니, 그때 네가 온 거지. 찬스에게는 그 말이 마치 넌 언제든 분리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온 힘을 다해 막대를 계속해서 돌려야 했고, 그 지점에서부터 그의 악착같은 전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의 빛나는 눈은, 단호한 목소리와 여유로운 제스처는 고군분투 같은 연속적인 휘저음 속에 탄생한 것이 분명했다.

“이름은 선두. 5살입니다. 부모는 선진국 출신 사람으로 유전적으로도 월등하고요, 눈치도 빠른 편입니다. 부모는 도시 4 대폭발 때 둘 다 죽어 우리 도시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선두…. 질환은 없는 것 확실하죠?”

“네, 전혀요! 피검사, 초음파검사, 의료검사, 검사란 검사는 다했는데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여기 병원에서 인증한 서류도 당연히 첨부되어 있고요, 이렇게 깨끗한 아이는 사실 드문 거 아시죠?”

남자는 부채로 눈 아래까지 얼굴을 가린 여자에게 몸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심지어, 요즘 세상에 신체도 훼손된 곳 하나 없다니까요?”

여자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보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심드렁한 눈빛의 여자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입양확인서>에 서명을 휘갈겼다. 선두는 그렇게 찬스가 되었다.

“1층까지는 외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겁니다. 잃어버리지 말고 통행권 한 개씩 미리 꺼내 준비해 주시구요. 지하로 가기 전엔 절차가 복잡하니 1층에서 다시 말씀드리죠.”

찬스가 익숙한 듯 업무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린 B 수학여행 전용] 이라 표시된 외부 엘리베이터 칸은 아래로 아래로 빠른 속도로 통과해 나갔다. 순식간에 넘어가는 교통수단의 흐름에 쓸려가며 아이들은 가슴팍이 간질거렸다. 내려가는 동안 층별로 랜드마크를 설명하는 안내방송이 몇 가지 언어로 짧고 빠르게 교차 설명되었다. 그때마다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사방의 벽들은 영상이 송출되는 화면으로 바뀌어 45층의 도시 사원과 신자들의 모습을, 35층의 초록 농원의 먹음직스러운 식물과 채소들을, 21층의 대표적인 레스토랑과 같은 것들을 내비쳐 주었다. 상층부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의 운행은 1층에 도달할 때까지 막힘이 없었다. 찬스는 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여행의 독점 운영권을 위해 시장에게 내바쳐야 했던 자신의 자존심을 비롯한 다양한 것들을 회상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내리고, 찬스가 마지막으로 내린 뒤 미리 협의 해둔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담당자는 날카롭게 통행권을 살피며 학생들의 서류를 죄다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괜히 피곤하게 사고가 났다간 자신도 면책을 피할 수 없기에 찬스의 어린 여행객들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로 인해 다른 때보다 두 세배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마지막 학생의 서류와 통행권, 데이터를 최종 확인하고 마지막 도장을 찍어냈다. 그러고는 찬스에게 다 되었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끄덕였다. 

“이제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그 지하로 들어갈 겁니다. 점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거예요. 지하 1층부터는 같이 걸어서 다닐 거고요. 걸어 다니면서 지하 건축은 어떤지, 음식은 어떤지, 경험해 볼 거예요. 최고의 수학여행 아닌가요?”

담당자의 눈빛을 읽은 찬스는 아이들을 향해 뒤돌아 두 팔을 허공에 벌리며 말했다.

마치 지하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신나하는 아이들의 반응은 매번 사람이 바뀌어도 똑같았다. 초반에 그 모습을 본 그는 역겨운 감정이 들어 미칠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어느 순간부터 설레는 감정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애초에 인생은 우연이 반복되어 쌓여가는 것. 자신이 이 행성이 망하는 꼴을 마주하며 살아가게 된 것도 우연. 이 환경에 내팽개쳐진 것도 우연. 그걸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이 별이 망하기 전에 삶을 살아갔을 최고로 부러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기획하는 찬스 그룹이 파악하기론 지하 10층까지는 치안이 괜찮은 편에 속했다. 오늘의 여행 코스는 지하 1층부터 지하 5층까지만 도보여행, 지하 6층부터 11층까지는 전용 버스로 도는 무박 수학여행용 코스였다. 지하의 시작인 지하 1층은 사실 상층부랑 다를 바가 없었다. 높은 층고에, 반짝거리는 타일, 넓은 면적의 집과 편의 시설까지. 어제까지 상층부에서 살았던 자들도 위화감 없이 지하 1층에서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상층부에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간혹 지하 1층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이 여행상품의 인기 요인 중 하나인 ‘지하 시민과의 만남’은 지하 2층에서 열렸다. 지하 시민과의 만남은 길쭉한 테이블에 일렬로 마주 보고 앉아 코스요리를 먹으며 진행되었다. 상층부 학교의 체험 다각화 교육을 명분으로 교육부조차도 인정하고 지원하는 만큼 또래 지하 아이들이 참석하는 만큼 선정 기준도 까다로웠다. 참석자의 가정에는 보육, 보험, 병원 등의 복지혜택이 주어졌는데, 보통 이 아이들의 부모 중 하나는 공무를 집행하는 자이거나, 본디 상층부에 거주하지만 파견되어 생활하는 자들의 자녀들이었다. 간혹 형평성을 위해 소수의 지하 시민 자녀들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아이들의 명단은 별도로 선생님들께 전달되어 대화 내내 주의해야 할 주요 인물로서 감시되었다. 아이들은 지하에서는 무슨 놀이를 하고 노는지, 무엇을 배우는지, 졸업할 땐 무엇을 먹는지, 게임을 하고 나서 간식으로 무엇을 먹는지 궁금해했다. 지하 5층 사이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신나서 자신들만이 하는 게임과 간식들을 떠들기 마련이었지만, 저 밑에서 올라온 몇몇의 아이들은 그저 질문에 입을 꾹 닫기 마련이었다.

지하 시민과의 만남이 끝난 후, 지하 거리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돌고래쇼의 돌고래를 보듯 창문에 바짝 달라붙어 장면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지하 11층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사람의 모습과 지하 12층에서 양 팔이 기계로 된 사람을 보자 아이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했지만, 지정된 곳이 아니면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규칙을 설명하며 아이들을 말리는 선생님과 떼쓰는 학생들의 장면이 반복되었다. 

여행의 중간중간 지하에서 먹는 이국적인 음식들도 학생들의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도시 내 다양한 국적이 섞인 만큼 전통을 지켜온 대표 음식과 퓨전이 된 음식들을 비교 설명하며 여행은 막바지로 나아갔다.

“여기 빵이 그렇게 맛있거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는 ‘카페 M’으로 크게 휘갈겨진 나무 간판이 달려진 가게로 뛰어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그와 눈을 마주친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는 자신을 보자 자연스럽게 일어나 뒤쪽으로 들어갔다.

“메리엇, 잘 지내셨죠? 저 여기 늘 먹던 빵 30개 정도 포장해 주세요. 계산은 화장실 좀 다녀와서 할게요. 민망하지만 좀 급해서.”

찬스는 익숙한 듯 사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주문을 하고선 화장실 좀 쓰겠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내비쳤다. 그는 몸을 돌려 미소를 거두고 낯선 남자가 먼저 간 길을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갔다. 따라가는 발걸음 뒤로 화장실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곤 가슴팍에 매달린 빨간색 브로치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건 사실 자신이 찾고 있는 자가 과거의 자신에게 쥐여준 귀걸이 한 쪽이었다. 왼쪽 가슴팍에 걸린 본래 귀걸이었던 빨간 브로치는 지니의 요술램프를 만진 듯이 저 편의 기억을 부드럽게 쏟아냈다.

“아니에요, 제 아이.”

남자아이는 방금 전까지 제 어미였던 여자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눈은 점점 멍해져갔다. 눈은 공허해졌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은 듯 그녀의 턱은 단단해 보였다. 심사관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고요?”

“제 아이 아니에요! 남편이 모시던 분의 아이였어요. 선진국 출신이고, 신체도 깨끗해요! 저 이 아이 엄마 아니에요 진짜! 얘, 너 고아라서 내가 잠깐 데리고 있었던 거잖아!”

그녀의 윽박에 아이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했다. 그는 어렸지만 자신의 엄마가 지금 대충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를 인지할 만한 눈치가 있었다. 심사관이 거침없이 그를 안아 돌아서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휘휘 내젓는 손을 향해 여자는 재빠르게 자신이 차고 있던 빨간 귀걸이를 넘겼다. 이윽고 그는 트럭 뒤편에 실렸다.

“넌 이제 살아남을 수 있다, 아이야.”

여자는 자신 곁에서 떠나보낸 작은 아이를 보며 읊조렸다.
남자아이는 여자와 멀어지자, 그제야 여자의 얼굴에 묻은 까만 먼지와 재가 보였다. 조금 더 멀어지자 상처 입은 팔과 손이 보였다. 그보다 멀어지자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허름한 옷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얼른 훔쳐 마지막 순간을 보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차올라 얼룩질 뿐이었다.

“어머님의 행방은 큰 진척은 없어요.”

무신경하게 손을 씻는 척하던 낯선 남자는 찬스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손에 고정한 채 나지막이 내뱉었다. 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옆으로 와 같이 손을 씻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신분을 하도 바꿔대니, 누굴 찾는 게 어렵고요.”

낯선 남자는 수전을 잠그고 손에 가득한 물기를 탈탈 털었다. 찬스는 지치고 착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형제가 더 있으신 건 모르셨죠?”

찬스는 남자의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굽힌 허리를 펴고선 시선을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렸다. 거울 속 남자 둘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서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찬스는 안경 너머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서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어머님께 딸이 있으셨던 것 같더라고요?”

남자는 코트 안쪽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찬스에게로 넘겨주었다. ‘선’이라고 휘갈긴 글씨. 종이를 뒤집으니, 해상도가 그다지 좋지 않은 여자의 옆모습이 나왔다. 찬스는 아무 말 없이 이 여자의 옆얼굴을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좀 더 알아보면 나올 것 같긴 한데, 잘 아시죠? 더 원하시면, 저 역시 더 받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어서요. 요즘 하도 여기 생활이 팍팍하다 보니.”

이 번엔 찬스가 자신의 뒷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건넨다. 그러곤 디바이스로 달력에 저장된 다음 스케줄을 확인한 후 말한다.

“17일.”

“그때 뵙죠.”

건네받은 두둑한 봉투를 사진이 있던 자리에 쑤셔 넣으며 남자는 답한다.

이번 수학여행이 끝나고 다시 위로 올라오면서 그는 전혀 알지 못했던 여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이 기분은 배신감일까, 부러움일까. 그럼 난 왜 버린 거야 도대체. 그럼 넌 왜 버려지지 않은 거야. 생각 더미에 쌓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의 아쉬움 섞인 말과 선생님의 감사 인사도 대충 대답해 버리고 만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온 찬스는 겉옷을 벗지도 않고 털썩 소파에 앉아 허공을 바라본다. 그러곤 한 여자가 들어가 있는 네모난 프레임을 꺼내 뚫어져라 쳐다본다.

“너 진짜 내 여동생 맞아?”

상층부의 그는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