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딸이 가지고 싶었다 그랬다. 아래위 남자 형제 사이의 둘째로 태어난 엄마는 속 시원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여자 형제의 부재를 평생 그리워했고, 그 부재했던 역할을 태어난 딸이 대신하길 바랐다.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하고, 엄마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을 하든 손발이 척척 맞는, 엄마의 분신 같은 존재. 첫 아이로 남자아이가 태어난 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아이를 셋이나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생명을 부여받게 된 딸아이가 세상 밖을 보게 된 건 어느 추운 겨울의 일이었다. 그렇게 태어났던 아이가 바로 나였다. 나는 엄마의 오랜 염원 속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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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엄마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외모부터 성격, 식성에서 옷을 고르는 취향,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우리가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가까이 있을수록 서로를 밀어냈다.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대며 마찰음을 냈다.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미운 점을 받아들일 수 있기 시작했던 건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서부터였다. 태어나 한 번도 곁을 떠나 살아본 적 없던 우리는 서로의 부재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일정 시간이 넘어가면 우리는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으면 죽는 사람들처럼 다시 가시를 세우고 기 싸움을 했다. 둘 중 한 명의 감정이 기어이 폭발하고, 화가 난 내가 다시 짐을 싸 서울로 돌아가 버리면, 며칠 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일들이 반복됐다.

우리는 얼굴을 보지 않으면 서로를 더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서로를 못 견뎌 하는 감정이 멀어진 거리와 함께 흐릿해지며 오직 거기에 사랑만이 남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도 서로를 견뎌내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의 한 단계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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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2019년 8월에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엄마, 아빠, 나 셋이 중국 샤먼으로 여행을 다녀온 지 딱 5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엄마가 투병 사실을 알리던 전화를 받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빨이 너무 아파 회사에 반차를 내고 치과에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엄마 전화를 받고는 길거리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발밑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실제로 세상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모든 게 달라지리란 것은 알았다. 엄마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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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내가 엄마에게 충분히 좋은 딸이었는지에 대해서 가끔 생각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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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장례가 끝난 뒤 몇 달 동안은 꿈에 계속 엄마가 나타났다. 꿈속의 엄마는 늘 아팠다.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가도, 끝에 가서는 꼭 아팠다. 아빠는 엄마가 꿈에라도 한 번 나타났음 싶다는데 나는 아픈 엄마가 나오는 게 싫어 잠드는 게 두려웠다. 아픈 엄마를 알았던 세월보다 아프지 않은 엄마를 봐왔던 세월이 훨씬 긴데도 그랬다. 

엄마는 더 이상 내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아픈 엄마의 기억을 극복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 그런 꿈을 꾸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무의식이 자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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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에게 전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새벽에 멍하니 누워있다가, 문득 엄마가 그리워져 전화라도 해볼까 생각했는데, 아, 더 이상 엄마가 내 전화를 받을 일은 없겠구나, 싶은 생각에 말 못 할 상실감에 잠겨 울던 밤이 있었다. 엄마는 여행을 떠났던 것이 아니었구나, 엄마는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거였구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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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역사의 한 부분이었고, 실제로 내 몸에 흐르는 피를 구성하는 존재의 일부였다. 내 삶에 그토록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는 아직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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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시고 7개월 뒤 조카가 태어났다. 엄마가 그토록 염원했던 손녀딸이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조카는,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돌아가신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어딜 가든 주목받길 좋아하며 눈이 크고 볼살이 터질 듯 통통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을 꼽자면, 먹을 것에 욕심을 좀 많이 낸다는 점이랄까(엄마는 먹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태어난 생명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조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돌아가신 몇 년간은 우리에게 몇 배는 더 깜깜한 터널 속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조카는 비탄 속에 내려진 축복이자, 가족 모두의 손을 이어주는 기적이었다.

조카의 탄생이 우리에게 전해 준 메시지는 단순했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 탄생하는 생명이 있고,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실이 있다면, 그 잃어버린 만큼의 상실을 메워줄 삶의 기쁨도 있는 법이라고.

누군가를 잃고, 다시 사랑하는 일. 이 모든 상실과 탄생의 과정이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그 잔인하리만치 단순한 삶의 순환 속에 있는 것이라고.

   🤱 문장들 #엄마

•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 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p.149

•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p.300 

•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 모순, 양귀자, p.45

• 어머니가 커튼이나 키친타월 가격이나 약속을 어긴 수리공에 대해서 투덜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내놓겠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5분만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지금은 또 그런 통화들을 떠올릴 때 후회에 사무친다. 참을성이 없었던 것이, 이토록 그리운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짜증을 느꼈던 것이. 제발 그때로 돌아가서 더 다정하게 말할 수 있다면, 짜증 대신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좋겠다.

-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p.148

•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 한 여자, 아니 에르노, p.110

✍️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친구들과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사를 보며 듣는 사람과 보지 않고 듣는 사람, 두 종류로 나뉠 때가 있다. 나는 전자이다. 어쩔 땐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듣지 않을 때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 가사에 대해서도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이니까 어떤 가사가 취향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좋은 가사는 주로 노래만 들을 때 발견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래에만 정신을 집중할 때, 좋아하는 노래를 타고 타고 탐색하는 시간을 가질 때, 그러다 새로 나온 앨범들 속에서 눈에 띄는 앨범 커버를 발견했을 때 등. 다른 일을 하며 배경음악으로 노래를 들을 때와 다르게 시간을 들여야 하고 한국어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장벽도 있지만, 듣기 좋은 가사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과 가사를 곱씹으며 텅 빈 시간과 생각이 채워지는 느낌이 좋다. 

그 생각의 시작은 주로 ‘지금 이 노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이 이야기에 끼고 싶다.’이고, 나는 음악 앱을 열어 주섬주섬 가사를 훑어본다.

이런 가사들은 모호하게 자기 이야기만 하지만, 내가 들어갈 틈도 조금 열어 놓는다. 뻔한 말로 위로를 건네거나 섣부르게 아는 척하지 않는다. 따라서 힘 안 나는데 힘 나는 척 안 해도 되고 내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고 심지어 대답할 의무도 없다. 듣기만 했는데 공감받는 기분이 들고 힘이 될 때가 있다. 또 위로와 공감을 넘어 언제나 내 호기심을 건드린다. 가사가 재미없는 사람들은 당최 궁금해지지 않는다. 내 호기심은 아주 얄팍해서 조금이라도 궁금하면 가사를 읽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한테 더 들을 이야기는 없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도 종종 있다. 반면에 놀랄 만큼 솔직하거나, 말이 너무 아름답거나, 이게 뭐지? 싶을 만큼 재밌거나 이상한 가사를 보다 보면 그 사람의 삶과 면면이, 심지어 다음 이야기는 없을까 궁금해진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선택을, 행동을 하게 됐을까? 어떤 노래는 알려주기도 하고 어떤 노래는 끝내 말하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맡기기도 한다.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에서 작가는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단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설명하고 그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사는 어쩌면 소설과 비슷할 것 같다. 내 평생 다 만나지 못할 성격과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를 벽 없이 듣는 일이 아닐까. 그것도 좋은 음악과 함께.

📝 Playlist :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모든 노래의 가사를 신경쓰며 듣는 것은 아니지만 책 한 권 읽듯 가사를 보며 듣는 것이 휴식이자 산책이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가사의 노래들을 몇 곡 소개합니다. 다시 들어도 여전히 하던 일을 멈추고 가사에 오롯이 집중하게 되는 노래들입니다. 리스트 속 노래들의 가사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좋아하지만, 이랑의 노래를 읽는 건 특별한 경험이였습니다. 앨범이 CD가 아닌 책으로 발매되었기 때문인데요. ‘신의 놀이’라는 앨범이자 책 속에서 이랑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면서도 예술이 주는 위로를 알고, 고단한 작업들을 거쳐 만든 그 위로를 사람들에게 건네면서 사실은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사를 보고 흥미가 생긴다면 (이미 절판되었지만..🥲) 책도 읽어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

좋은 이야기가 있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좋은 이야기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나요

- 이랑, 신의 놀이

💿 최엘비, 아는 사람 얘기

💿 sogumm & 오혁, 야유회

💿 우효, Teddy Bear Rises

💿 새소년, 난춘

💿 가을방학, 속아도 꿈결

💿 가을방학, 인기 있는 남자애

💿 브로콜리 너마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feat.최엘비)

🎇가벼워지는 힘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신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생각이 많으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가벼워지는 거야.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메모한 구절이다. 저 메모를 쓸 때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을까.

저 책을 읽었던 당시 썼던 일기를 보면 합리화로 가득한 부정을  꾹 꾹 눌러 쓴 하루하루가 있다. 당시에는 나 자신을 가장힘든 사람, 노력하지만 타이밍이 따라주지 않는 불행한 사람으로 프레임씌웠다. 아니다. 어쩌면 이조차 생각지 못할 정도로 나를,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지 않고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5월인지 6월인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요즘이다. 매주, 반복되는 매일에 토요일과 일요일만 있다. ’라고 쓴 21년도6월의 일기를 보면 나는 참 흘러가는 대로 살았구나. 바쁘다는 핑계로 복잡한 머릿속은 정리하지도 않은 채.

이렇게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데, 복잡한 현재의  머릿속을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겠는가.

복잡한 마음에 복잡한 생각이 더해지면 그것은 더 복잡한 마음으로 커진다. 복잡한 마음은 부정의 생각을 낳고, 이는 부정 동력이 되어서 무기력하고 부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생각이 곧 동력’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나를 관통하고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중력과 억압들로부터 떠오르지 못한채 좁고 편협한 마음으로 나만의 부정 동력으로 매일을 가득 채웠던 날들이다.

어느 날, ‘손님을 위한 공간은 열심히 가꾸고 돌보는데 왜 정작 내 공간은 이렇게 뒷 전 일까’라는 생각에 출근 전 현관에서서 침대를 봤다. 몸만 겨우 빠져나온 형상으로 돌 돌 말린 이불이 보였다. 왠지 모르는 정리 욕구로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가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베개를 탁 탁 털어 제 위치에 놓고 나왔다.  이 사실을 잊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불을 켜자  깔끔한 침대를 마주했다. 이불만 가지런히 했을 뿐인데, 이 모습이 나로 하여금 깨끗이 씻고, 잠옷으로 환복하고 잠들기 전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만들어 움직이게했다. 그리고 머릿속을 정리하고싶어서 책상을 치우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을 썼다. 연필로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썼다. 잠복하고 있던 생각도 떠오르고  이런  생각을 내가 했던가 하는 것들도 썼다. 다 쓰고 나니 친구 앞에 앉아서 하소연 하는 것 보다 더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억누르고있던 돌맹기가 사라진 가벼운 마음이었다.

글로 읽어보니 생각만 하던 때와는 달리 별거아닌데 지레 겁먹을 것들도 있고, 곱씹으면 풀리는 일들도있고, 앞으로 잘계획하면 헤쳐나갈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부정 굴레 상상 속 부정 동력이 만들어낸 중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정리하고 마주하는 것. 그게 생각이든 나의 주변 환경이든.

그 때 부터였다. 손바닥만한 노트와 연필을 항상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던 시점이. 

타성에 의한 중력을 벗어나기 위한 시작.

🎇 잘린B 어귀의 유리

모든 것은 휴일 전야에 시작된 복통 때문이었다. 몇 주 전부터 배가 살살 뭉친 것 같은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날처럼 유독 배 아래를 강타하는 찢을 듯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찌릿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유리가 배를 감싸 쥐고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하얗게 질린 채 달려온 건 맞은편에 앉아있던 샬럿이었다. 샬럿은 나무 식탁 아래에 나뒹구는 그를 감싸 안았다. 유리는 샬럿이 기껏 준비해 놓은 수프를 한 숟갈 떠먹어 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는 사실이 허무할 뿐이었다. 오랜만의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샬럿이 자신의 요리 실력을 으스대며 몇 시간이고 주방 부엌에 서서 저어대던 수프였다. 수프 젓기가 조금 지루해진다 싶을 때마다, 앞치마를 두른 샬럿은 근육질의 팔을 휘두르며 유리를 향해 이럴 때 쓰라고 단련한 신선한 근육이라 외쳤다. 우스꽝스럽게 국자를 들며 이런 자신이 좀 섹시하지 않냐는 장난섞인 물음도 함께. 유리는 벌떡 일어나 없던 일처럼 고쳐 앉고 싶었지만, 어딘가 고장나도 단단히 고장난 듯 몸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병원 가보라니까 그러네.”

샬럿이 유리의 목뒤를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목 뒤로 샬럿의 손끝에 벤 차가움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유리는 그에 비례하는 안정감을 느꼈다. 

“괜찮아질 거야. 얼마 전에도 이랬는데 금방 괜찮아졌었거든. 이러다가 금방 말아. 너 없는 동안 뭘 잘못 먹었나, 이상하네. 네가 하도 집을 비워서 그래. 하필 이런 날, 미안해.”

그녀는 힘을 짜내어 희미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샬럿은 바닥에 접혀있던 유리를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쉽게 들어 올렸다. 샬럿의 부축 덕분에 유리는 샬럿의 힘에 의지해 일어날 수 있었다. 샬럿이 풍기는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향을 맡는 순간, 유리는 그대로 샬럿의 몸에 파고들어 그를 살짝 안았다. 그런다고 통증이 줄어들진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 근심 없이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샬럿은 그런 유리를 빤히 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헝클고는 당신은 좀 누워야 한다며 그를 침대로 옮겼다.

“이번 휴일이 지나면, 팍스 아저씨한테 같이 한 번 가보자. 함부로 미안해하지는 말고.”

샬럿은 폭신한 솜 이불을 유리의 가슴팍까지 훅 올려 덮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쇳내나는 두툼한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결대로 쓸어내리더니 장난스럽게 입술을 톡 건드렸다. 서로의 은근한 시선들이 만나 허공에서 맴돌았다.

“어휴, 오늘 너 보려고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유리는 한 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어 샬럿이 말한 고생으로 보이는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연갈색 눈썹 위로 눈꼬리 부근까지 찢어진 상처와 입술 끝에 남은 피딱지를. 손으로 그의 눈부터 입 부근까지 쓸어 내려오다 군데군데 혹으로 매끄럽지 않은 굴곡을 만났다.

“걱정하지 마. 고생은 좀 했지만, 이런 것쯤은 이제 아프지도 않아.”

샬럿은 유리에게 따뜻한 물과 함께 갖고 있던 진통제 한 알을 건네며 이어 말했다. 잘 드는 무기뿐 아니라 넉넉한 수량의 진통제는 샬럿에게 임무에 꼭 필요한 필수품이기도 했다.

“다만 요즘 들어 전투를 해야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어.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제 이걸 전투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조차 모르겠어. 우리가 살기 위해 이 도시에 들어온 것, 기억해?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다른 것을 파괴해야만 하는 게 내 임무가 맞나 싶어. 스스로를, 우리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수호자’가 되었는데. 내가 진짜 하고 있는 일이 수호하는 일이 맞는 걸까?” 

샬럿과 함께 태어났다고 봐도 무방한 그 많던 장난기는 어디로 갔는지, 오랜만에 돌아온 그는 다소 울적한 기운을 풍겨댔다. 

“나……. 사람을 죽였어, 유리.”

조용히 말을 내뱉은 그는 큰 몸집을 웅크리고는 유리 옆에 몸을 접어 누웠다.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그럴 때마다 샬럿은 집으로 돌아와 유리에게 이와 같이 고해성사를 하곤 했다. 이내 바위 같은 몸이 들썩거렸다. 샬럿의 눈물은 작게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포효가 뒤섞인 울음으로 이어졌다. 유리는 그런 샬럿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병원은 나만 갈 순 없겠네.”  

끝없는 밤의 도시라 불리는 잘린B. 이름에 붙은 B를 보고 누구는 벙커를 얘기한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지하를 나타낸다고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2개의 도시 중 모든 도시들의 지하에만 이름 뒤에 B가 붙는다는 사실이었다. 강대국이 힘을 합해 만든 북쪽의 도시들은 모두 위아래 세로로 길쭉한 직육면체의 형태였다. 도시의 끝과 끝은 포용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고, 덕분에 아주 깊은 층에는 끝없는 밤이 낭자했다. 이 층의 의원이라 불리는 자는 두세 층 위, 그 만큼의 아래를 포함해도 단 한 명이었다. 팍스는 나이 지긋한 의사이자, 엔지니어이자, 약방 주인이기도 했다. 시대의 번영과 퇴보는 팍스를 번듯한 의사 타이틀에서 몇 가지의 직업을 더 추가하게 만들었다. 심해 같은 이 깊은 곳에서는 마치 심해 생물체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듯,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곳 주민들 중 상당수가 점점 기계와의 신체 접합된 ‘결합인’들이 되고, 그 수가 늘어나자 그들은 팍스를 찾았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손기술로 심층의 주민들을 고쳐 주었다. 자연스레 그는 두 가지 일을 겸하게 되었고, 간단한 약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지하층의 보건을 책임지게 되었다.     

“팍스, 유리한테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보호자를 굳이 따로 불러내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지만,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샬럿은 상황을 부정하며 물었다.   

“…. 샬럿….”

어둡고 낡은 방에서 우두커니 화면을 응시하던 노년 남자의 얼굴엔 묘한 표정 몇 가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왜 그러는 거야, 팍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냐니까.”

점차 샬럿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팍스는 재빠르게 뒤돌아 검지를 입가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미간을 확 찌푸리며 속삭였다. 버럭 하는 속삭임이었다. 

“조용히 좀 해! 일단 주사를 놔뒀으니까. 혹시 몰라 주입했는데, 효과는 또 있단 말이지….”

그의 소리 죽인 야단에 샬럿은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멍해졌다. 팍스는 한 걸음 샬럿에게로 다가와 지그시 그의 손목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샬럿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노려보기도 하고, 잠깐 눈을 돌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팍스는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손톱으로 제 입술을 잡아 뜯으며, 연신 오른쪽 왼쪽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샬럿은 무척이나 답답했지만 팍스가 그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가만히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팍스는 이 깊은 곳에서 그만큼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샬럿에게로 다가왔다. 입술을 쭈뼛쭈뼛하는 게 마치 머릿속으로 할 말을 되새김질하며 정리하는 듯 보였다.

“자네, 유리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팍스. 이쯤에서 그만하지 그래. 내가 여기서 당신을 생각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더는 못 봐주겠군. 아픈 사람 데려왔더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유리는 어디 있는데? 얼른 약이나 지어주지 그래.”

팍스는 다 헤어지고 찢어져 골동품 같은 등받이 없는 작은 가죽 의자에 털썩 앉더니, 다리를 달달 떨었다. 다리를 떨다가 손가락을 튕기고, 후후 숨을 몇 차례 내뱉었다.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그의 상태에 샬럿도 이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태임을 깨달았다. 

“샬럿. 유리는 로봇이야, 안드로이드….” 

노인이 안경을 내리고는 샬럿을 바라보자 시간이 멈춘 듯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샬럿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도 참, 지하 생도들 중 반은 고철 덩어리야.” 샬럿은 당연히 알지 않냐는 듯,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팍스에게 보여주며 살짝 흔들어 보였다. 두툼하고 무겁고 큰 손. 그 손은 겉으로 보기에도 흔히들 아는 보통의 피부 표면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쇠와 고철들로 이음질된 기계 팔이었다.

“아저씨가 해준 내 오른팔. 이거 기억 안 나?”

샬럿의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방안에 대뜸 벌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샬럿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 위로 걸어가더니 놓인 작고 검은 물체를 들어 몸체보다도 더 작디작은 스위치를 조정했다. 그가 미세하게 조정했을 뿐인데, 그것은 생각 외로 쉽게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었다.

“얼마 전 1층의 하비가 이런 걸 가져왔더군. 분리를 모두 했는데도 가끔 본분을 찾는다는 듯이 매미소리를 삑 내뱉곤 해. 자기가 진짜 매미인 것 마냥.”  

노인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기계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두고는 혼이 나간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유리는…. 이런 거라고.”

팍스는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유리에게 잘 꺼내지 않았던 오래된 초음파 기계를 꺼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듣고 누구보다 혼란스러워하던 것은 유리였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속일 수 있겠냐며, 자신이 실제 겪은 일들은 모두 그럼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믿지 못하겠냐며 그럼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던 그녀가 메스를 집었다. 샬럿이 미처 말릴 수 없는 짧은 찰나, 그녀는 자식의 목 바로 밑 부분을 찔렀다. 피가 튀어나왔다. 빨간 피는 그의 옷을 적셨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저 목 언저리가 따끔따끔할 뿐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샬럿과 팍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곤 일어나서 각종 도구가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 순식간에 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내리쳤다. 역시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살점과 핏물 사이로 보이는 건 아주 정교한 기계였다. 샬럿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샬럿은 피비린내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유리가 흘리는 피에서는 비릿한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샬럿은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유리는 본인과 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마지막 가족이었던 남동생을 묻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렇게 샬럿과 유리는 가족이 되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어둠이 울타리가 되어 살아온 삶이었다. 샬럿이 온몸으로 그녀의 몸부림을 받아내자 유리는 힘이 한 번에 쫙 빠지는 걸 느끼며 주저앉았다. 서 있는 팍스, 자신의 뒤에 있는 샬럿, 그리고 이 퀴퀴한 약방 의원의 각종 잡동사니들이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온 이 기억은 뭐지? 유리는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