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거리는 늘 멀지 않았다. 위대한 작가나 독서광들의 어린 시절이 으레 그렇듯 어렸을 때부터 책이 가득한 서재를 가진 부모님을 둔 아이는 아니었지만, 책은 늘 손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놓여있었다. 머리가 커서도 책을 멀리 하지 않았던 건 그런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책과 함께 자랐고, 책과 함께 성장했다.

불안을 달래려 책을 읽던 시절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될 수 없을 것 같고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시절에, 어쩌면 존재 가치를 부여 받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펴들던 그때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눈 앞의 책을 손에 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을 들고, 종이의 감각을 새기고, 페이지를 넘기고, 글자 간의 공간을 더듬고. 하얀 종이에 빼곡히 적힌 문자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손에 책을 들고 누군가의 외침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요즘은 습관처럼 책을 손에 든다. 루틴이란 걸 살면서 제대로 지켜본 적 없는 사람이면서, 책을 손에 드는 건 그리도 쉬워서 가끔은 해야 할 일을 잔뜩 쌓아두고 책을 읽는다. 한 때는 소기의 목적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도 흐릿해져서 가끔은 내가 이걸 왜 읽고있는지를 생각하며 읽는다. 근데 읽기를 그만두지는 못해서, 그냥 읽는다. 아무 생각 없이.

버지니아 울프는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듯 습관도 삶의 얼굴을 바꿔놓는다고 했는데, 무언가를 계속해서 읽어왔던 내 삶의 얼굴도 나도 모르는 새에 그렇게 천천히 바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이 그리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으로 인해서 내가 삶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겠다.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읽는 존재로서의 나는 삶을 애처롭게 사랑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책을 읽을 명분은 충분했다.

오늘도 모든 일과를 마친 늦은 밤, 습관처럼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조용히 독서등을 킨다. 협탁에 올려둔 세 권의 책 중 내키는대로 한 권을 집어들고, 책을 펴 무릎 위에 올려둔다. 밤의 고요가 잦아든다. 조금은 낡은 듯한 종이 냄새를 느끼고 눈으로 이리저리 자간과 행간 사이를 훑으며, 오늘도 나는 읽는다. 책이 바꾸어놓을 먼 미래의 내 삶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하며.

   📌 문장들 #책

•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한 채 가만히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늘 책을 들고 가만히 카페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몰라 앉아 있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읽고 쓰는 동안 무수한 시간이 멍청한 나를 통과해 갔다. 그래서 앉아 있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구나, 알게 됐다. 새로운 시작도 성가신 도망도 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혹은 아무것도 흘러가지 있지 않다고 착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 책의 말들, 김겨울, p.71

•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몸으로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한솔은 열여섯 열일곱에 읽던 책들을 지나가며 아 이미 헤어졌군 우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게 된 사람들도 가끔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인터내셔널의 밤, 박솔뫼, p.89 

• 당시 나에게는 힘과 젊음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서 깊은 밤을 배회했다. 다행히 그 밤 빛이 있었다. 책이었다. 한 외로운 사람이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면 그 시간은 ‘영혼의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는 늘 영혼이 있었다. 나는 그 시간 덕분에 좋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육체적 기쁨’인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이야기가 나를 공기처럼 에워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아무튼 메모, 정혜윤, p.28

• 나에게 독서는 기분 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p.12

• 읽는 것은 타인의 손을 통해서 꿈꾸는 것이다. 건성으로 읽는 것은 우리를 이끄는 그 낯선 손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피상적인 교양이야말로 훌륭하고 심오한 독서를 위한 최선의 전제조건이다.

-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p.401

✳️ 거대한 너의 눈을 바라보는

지하철 7호선을 타고 뚝섬 유원지와 청담 사이를 지나가면 진하고 강렬한 빨간색의 한강을 만날 때가 있다. 매일 타는 지하철일지라도 어떤 날은 흐려서 못 보고 어떤 날은 해가 지는 타이밍을 놓쳐서 못 본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귀한 풍경을 마주칠 땐 누구라도 붙잡고 ‘지금 너무 이쁘지 않아요?’하고 이 순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꺼낸다.

때마침 그날 내가 지하철에서 그 풍경을 보며 듣던 노래는 박지윤이 피처링한 황소윤(So!YoON!)의 ‘Love(a secret visitor)’이었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담담한 목소리로 박지윤이 ‘거대한 너의 눈을 바라보는’이라는 첫 소절을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이 아니면 안 되는 노래와 목소리가 있다. 나를 들뜨게 만들고 노래와 장소와 모든 게 너무 좋지 않냐고 지금 당장 말하고 싶게 만든다. ‘좋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와 가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는 순간에 이 노래라니. 박지윤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눈앞에 실재하던 풍경과 그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박지윤은 내가 아주 어릴 때 ‘성인식’을 불렀던 가수였고, 그 노래를 잘 몰랐으니까 그 뒤로도 들을 일이 딱히 없는 가수였다. 어쩌다 듣게 되어도 그저 '목소리가 독특하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게 된 건 2017년 12월 박지윤을 좋아하는 동생과 함께 간 그녀의 콘서트에서였다. 평소에 듣던 노래가 아닌지라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좀처럼 들을 일이 없다는 생각에 따라갔다. 다녀온 지 너무 오래되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멘트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분위기와 느낌은 생생하다. 어둡고 조용한 콘서트홀에 올려 퍼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숨죽여 노래 듣는 사람들과 섞여 에너지와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목소리가 크고 깊은 현악기 같아서 왜 20명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콘서트를 구성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박지윤의 노래가 생각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박지윤의 섬세하고 풍부한 목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거나 자주 듣는 취향의 것은 아니다. 노을로 물든 한강을 지났던 그 순간처럼 우연히 듣게 되거나, 문득 생각날 때만 찾아 듣는다. 이 목소리가 어울리는 때와 장소가 찾아올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아껴 들으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매일 들어 희석시키고 싶지 않다. 박지윤의 노래와 목소리가 주는 꿈같은 느낌을 최대한 온전히 느끼고 싶다.

🌉 Playlist : A midsummer night's voice

글을 쓰다가 이 글을 쓰게 된 노래인 ‘Love(a secret visitor)’의 코멘터리를 들었는데, 소윤(So!YoON!) 역시 기존 노래들과는 이질적인 이 노래를 통해 ‘한여름의 판타지, 보이지 않는 대상에 관한 이야기, 비현실의 사랑’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싶어 그녀와 협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부른 소윤(So!YoON!) 또한 목소리하면 빠지지 않는 보컬이라 둘의 노래를 섞어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까 고민했는데.. 둘의 에너지는 결이 다르기도 하고 언젠가 새소년에 대해서도 글을 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이번 플레이리스트는 박지윤의 목소리로만 채웠습니다.

거대한 너의 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용한 거리의

습격처럼 벅찰거야

두려운 것들을 가득 모아

내 온몸에 전부

다 쏟아버리고

-So!YoON!, LOVE(a secret visitor) [feat.parkjiyoon] 중

🎇 어깨를 감싸고 토닥여주는 문장

퇴근하고 집에가면 세탁기 돌리고 청소도하고 온갖 할 것들이 생각나는데, 막상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 퇴근길에 세운 계획은 도어락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바닥에 누워 의미없이 핸드폰만 하다 잠드는 날로 가득찼던 시절이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씻지도 않고 잠이 들거나, 오늘은 계획 세운 것들은 하고 자야지란 생각은 있지만 지독하게 움직이지않고 누워서 게으름과 줄다리기하다 이도저도 하지않고 새벽까지 버티는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게으름과 맞이한 새벽이 더 많을거다.

그날도 역시나 아무것도 하지않았다는 죄책감을 책이라도 읽어서 없애보자는 생각에 밀리의 서재에 들어가서 책 하나를 골랐다. 제목에 끌려 선택한 책이지만 제법 술술 읽히다가 이유모를 위로받는 문장에 노트를 꺼내 메모를 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 일에 간섭할 것이고, 고마워 할 줄 모를 것이며,

거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질투심 많고 무례할 것이다. 하지만 그 들 중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마음에 짜증이 들어서고 부정이 날을 세우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전투태세를 취하고. 일을 하며 놓여지는 상황들에 손해보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을 만들기 시작했던게.

짧지만 ‘집 밖은 이렇게 위험하니 조심해’ 어깨를 감싸주고 토탁여주는 문장이었다.

나는 문제없이 지극히 정상이니 지금처럼 나아가도 된다는 힘과 용기.

🎇 1층의 하비

남자는 무빙워크에 빠르게 올라타고 선 시선을 천장에 고정했다. 그리곤 눈알과 고개를 돌려가며 좌우로 꼼꼼히 그리고 날카롭게 시선을 응시했다. 찡그린 미간 아래 동공의 움직임이 멈춘 곳은 보일 듯 말 듯 한 균열 한 조각이었다. 하얀 구름이 풍속에 맞게 흘러가고 있던 그 하늘에 있는 손톱만 한 검은 점을 발견 한 것이다. 검은 점은 지나가는 구름 일부를 가렸다. 그다음 구름, 또 그다음 구름이 지나가도 검은 색종이를 고정시킨 듯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구름의 마지막 꼬리가 흘러가자 파란 아침 하늘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역시나 부분적으로 댕강 잘라낸 듯한 검은 점이 있는 곳은 미처 메우지 못하고 있었다. 낮은 한숨을 내뱉은 남자는 한 손으론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다른 한 손으론 귀에 꽂혀있던 통신기를 두드려 어디론가 급히 연결했다.

"안녕하……."

"수, 잘린B 8구역 하늘."

"아, 네 하비 팀장님!"

"후, 이거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확인을 못 했던 거야?"

마치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려는 팝콘을 프라이팬 뚜껑으로 덮어버리는 것처럼 그는 ‘수’라는 자의 인사를 채근 섞인 물음으로 막아냈다. 덕분에 수의 인사는 댕강 잘려 버렸다.  

"아…. 조그마한 오류가 있었나 본데요…."

"좌표 보내줄 테니까 빨리 조치하고. 다른 발생지가 더 있는지 확인해 볼 테니까, 시스템 다시 똑바로 확인해 봐. 오늘 같은 날은 특히 점검해야 할 것 아냐."

찬란한 빛을 연신 내뿜던 여름 하늘은 어딘가로 조각조각 흩뿌려지며, '영원하라, 도시 1' 이라는 문구와 함께 태양 문양과 숫자 1이 덩어리 된 표식이 쓸려 나타났다. 이는 도시 1이 표방하는 슬로건으로, 앞으로 30초간은 도시 선전 시간이었다. 무빙워크가 몇 개의 도로와 가게들을 지나쳐 검은 점이 더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그는 균열 발생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울고 있는 매미들의 아우성은 여름이란 계절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유니폼인 선명한 오렌지빛 점프 수트는 긴 팔이었다.

"팀장님, 말씀하신 잘린B 8구역 하늘은 바로 엔지니어 보내 조치했습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어서 미처 눈치챈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팀장님이야 워낙에 타고난 눈을 가지고 계시니, 보였을지도요…. 다른 곳들도 층별로 재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보수가 필요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비의 눈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에 다른 것을 말할 때 보다 유독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목소리에 힘을 빼고선 내뱉은 말이 본인 주위만 맴돌고, 그에게는 도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비는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두고는 수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을 넘겨 스케줄을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의도적인 적막감을 유지했다. 수는 자신을 옥죄는 투명한 적막감을 깨버리려는 듯 큼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 제가 잘 확인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주눅이 들어선 하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 우리가 하는 일은 간단한 거야."

하비는 겨드랑이에 체크리스트를 낀 채 베이지색 바닥 타일에 눈을 내리깔고 있는 수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동시에 그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곧장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기에, 바닥 패턴을 세던 수는 자연스레 그의 등짝만을 바라봐야 했다.

"사람들을 우울하지 않게 하는 거.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검지를 허공에 휘휘 저으며 말하는 덕분에 그는 마치 무언가를 지휘를 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닫혀있던 철제 블라인드를 스크린에 나타난 버튼을 눌러 90도 각도로 만든 뒤 이어 말했다.

"이 뷰를 봐, 사람들이 현실을 보면 미치지 않고선 배기겠냐고."

블라인드 틈과 틈 사이로 창문 너머 황량한 폐허가 조각조각 보였다. 회색과, 황토색 그 어딘가 버무려진 황무지 바닥의 색깔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 걸린 희끄무레한 안개는 한층 더 서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팀장님. 요 근래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참, 좀 이따 위에 가시죠?"

"그래. 오늘 행사에 대해 회의 좀 하자더군. 다녀올게. 오늘은 긴 하루가 될 테니까 체력 안배하라고."

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 하비는 수가 방을 나가고도 가만히 앉아, 블라인드로 인해 길쭉하게 갈라진 바깥세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린B’라 불리는 지하구를 관리하기 용이하다는 명목 아래, 1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선 날 선 바깥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다. 그가 살아 있는 한 1층은 그의 한계일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실재하는 자연을 볼 수 있는 이곳이 퍽 나쁘지 않았다. 그가 책임자로 있는 하늘 시스템의 운영은 그가 수에게 말한 것처럼, 실제로 아래에 사는 사람들의 우울감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를 도출해냈다. 청명한 하늘만 주야장천 틀어대던 초기 시스템은 점점 더 발전해 과거 데이터 값을 기반으로 계절감과 시간에 따른 하늘의 변화로 진보해왔다. 덕분에 이 사무실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가끔은 망가져 버린 이 세계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전에 보았던 미세한 균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검은 네모 조각이 가슴 어귀에 콕 박힌 것 같았다.

하비는 다섯 번 정도의 보안검색과 절차를 걸쳐 85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하고도 무인 안내에 따라 초고속 이동 수단이라 불리는 ‘셰르파’를 타고 지정된 곳에 내렸다. 그가 내리자 문 앞에 보초를 서있던 거구의 보안요원이 무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훑었다. 하비는 이 모든 단계가 익숙한 듯 몸을 내어주곤 가만히 서있었다. 보안요원이 암호를 속삭이더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는 턱을 쳐들어 하비에게 문을 향해 들어가란 신호를 줬다. 열린 문 너머로 정장을 입은 자가 구강청결제를 칙 뿌리더니, 하비를 발견하고는 양 팔을 벌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넉넉한 풍채와 패인 몇 줄의 주름으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자는 하비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하비. 행사 준비하는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만.”"

"준비는 차질 없이 되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불꽃놀이 행사에서는 좀 더 우리 ‘도시 1’이 내세운 모토가 잘 보였으면 싶어서. 요즘 자네도 알다시피 이것저것 분란이 많았지 않나. ‘도시 4’, ‘도시 5’ 상관없이 난리야! 다들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참 나. 사람 맘이 맘 같지 않다니까."

말을 하면서 집사로 보이는 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니, 정장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집사는 꽃무늬로 휘감겨진 주전자와 컵 두 개를 들고선 그들에게 다가왔다.

"하비, 이거 커피야. 들게. 귀한 거라고. 하하하, 어디서 구했냐는 표정인데? 그치? 맞지? 물론 우리 ‘도시 1’에서는 구할 수 없지. 이거 ‘도시8’에서 비싸게 주고 구한 거야. 거기서 재배를 성공해서 아는 사람 통해 좀 얻었어. 향이 어마 무시하게 좋은데, 한 번 마셔보지 그래."

하비가 찻잔을 들고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자, 남자는 좋다는 말을 들으려 안달 난 사람처럼 그의 반응을 빼꼼히 기다렸다. 하비에게 좋다는 말을 들은 남자는 그제야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난번에 내가 말한 것은 좀 생각해 봤나? 요즘 워낙 시끄러우니 말이야, 위에서는 아래 사람들을 좀 알고 싶어 하거든. 그것도 속속들이. 하늘 시스템에 공중감시 관제 시스템을 넣는 것 말일세. 자네도 껄끄러울 수 있는 얘기인 건 알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거거든. 아니 물론 나도 이렇게 세상이 망할 줄은 몰랐지만! 얼마 전에 ‘도시 4’가 폭발하면서 우리 위쪽 사람들은 너무너무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일세! 뭐, 그렇다고 아래 사람들을 감시할 목적은 아니고. 그냥 이름이 그런 것뿐이지, 흠흠."

하비는 그의 물음에 미처 답하지 못하고 커피를 두세 모금 더 홀짝이고는 통창으로 이루어진 왼쪽 유리를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그의 제안에 응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다. 그의 말이 하비의 귀를 쉴 새 없이 때릴 때마다 오전에 보았던 균열이 점점 커져가 자신의 가슴속을 삼켜버리는 느낌이었다. 하비는 가슴이 답답해져올 때마다 간신히 커피로 쓸어 넘겼다. 오랜 기간 잊고 지내던 맛이었다.

"생각 좀 해봐 봐, 하비. 그것에 대한 투자는 걱정하지도 말고. 난 자네를 믿는다네. 그리고, 자네도 이젠 조금 더 올라올 때도 되었지 않은가!"

남자는 찻잔을 들이키면서도 조그만 안경 너머 하비를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하여튼 불꽃놀이도 그렇고, 우리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아래 사람들도 좀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이런 우리의 마음을 불꽃놀이 행사 때도 조금 더 녹여 보라구."

하비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수다스러운 그와의 짧은 만남은 항상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끝나기를 오매불망 바랐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몇 번 방문했어도 해가 비치는 시간대에 온 적은 없음을 깨달았다. 햇살은 그들이 있는 공간 깊숙이 침투해 전체를 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였다. 하비는 손바닥을 들어 햇살이 자신의 손바닥을 곧게 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근데 여기는…. 진짜 햇살을 받고 사시는 기분은 어떠신지 좀 궁금하네요."

"똑같지 뭐. 아이고 이 사람, 웃기기는! 자네 사무실에서도 볼 수 있으면서!"

하비는 자욱한 안개의 사무실 창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은 연쇄 작용을 하며 보통의 집과 같이 창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집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 참. 가짜 창은 있지. 그는 여기서 뿌리에서 휙휙 자유로이 뻗어 나가던 잔가지 같은 생각의 흐름을 멈추었다.   

하비는 의원이라 불리는 자와의 껄끄럽고 어지러웠던 만남 이후, 행사를 감독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 지하구로 내려왔다. 불꽃놀이는 하늘 시스템 구축 이후 ‘도시 1’에서만 진행되어 왔던 나름 전통이 있는 큰 행사이기도 했다. 5시에서 6시로 갈 무렵, 계획된 대로 핑크색 하늘이 두둥실 떠올랐다. 핑크색은 주황색으로, 이내 사이사이 푸른 보라색으로 물감 풀어지듯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붕괴된 세상을 억지로 잊으려는 듯 아니면 이전의 세상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으려는 듯, 멍하니 ‘하늘’ 이라 불리는 것의 순간순간을 눈에 담았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도, 옷도 하늘빛에 따라 물들었다. 하늘이 짙은 색으로 천장을 모두 뒤덮자, 수는 송수신 시스템을 통해 하비를 포함한 직원들에게 층별로 모두 세팅이 완료되었다는 말을 모두에게 고지했다.

3,2,1 카운트다운과 함께 오전에 보았던 ‘도시 1’의 모토와 문양이 여름 밤하늘에 웅장하게 나타났다.

‘하나가 되는 1! 영원하라 1!’

그러고는 시장의 얼굴이 나와 모두 함께 평등하게 나아가자는 의미로 불꽃놀이를 준비했다는 일장연설이 새어 나왔다. 탐탁지 않았지만, 의원과의 오전 만남 이후 갑자기 추가 설계된 부분이었다. 이에 소리 지르며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왁자지껄한 야유 소리는 매미 울음소리와 뒤섞여 엎치락뒤치락 대결을 하듯 울려 퍼졌다. 드디어 시장의 얼굴이 화면전환으로 사라진 밤하늘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빨간색으로, 초록색으로 팡팡 터지는 장면을 사람들은 고개를 힘껏 쳐들고 바라보았다. 특히 노란색 불꽃이 느티나무처럼 우수수 떨어질 때에는 와아 하는 감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비는 하늘이 아닌, 하늘을 멈춰 서서 연신 넋 놓고 보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수놓은 불빛들을 쳐다보는 수많은 동공들은 반짝임으로 넘실거렸다. 그는 몇 걸음 더 걸어가 오전에 보았던 검은 점이 있는 위치에 멈춰 서서 그 곳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져, 완전에 가까운 하늘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끝을 향해 달려간 불꽃놀이의 마지막 피날레로 화려한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핑크색 불꽃이 부채꼴 모양으로 터지자, 수가 무전을 통해 말했다.

"팀장님, 여러분, 정말 아름다운 마무리네요…. 이번에도 수고하셨어요, 모두들."

모두가 숨죽여 바라보았던 불꽃놀이 행사가 끝난 뒤, 아랫동네는 다시 원래대로 시끌벅적한 거리로 돌아왔다. 나름 도시의 큰 행사답게 사람들은 하늘 아래 자리를 펴고서는 내일을 잊은 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하비는 행사가 끝나자 곧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긴장으로 뭉친 근육 때문인지 피로감이 한 번에 쏟아졌다. 그는 수에게 오늘 일에 대한 사과와 고마움을 전한 뒤, 바로 퇴근하라는 말을 하고 본인도 곧장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거리를 벗어나 소음이 잦아들 때쯤 그는 무언가를 제대로 밟은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발 한쪽을 들었다. 그는 한 발자국 뒤로 가 바닥을 확인하곤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검은색 물체를 들어 올리니 이내 일부가 바스러지며 떨궈졌다.

하비가 밟은 것은 바로 매미였다. 이 정도 밟혔다면 살아 있을 리 만무한데, 매미는 계속 발악하듯 울어대고 있었다. 그가 매미를 손으로 꾹 누르자, 아그작하며 속 안에 있던 작은 기계장치가 튀어나왔다. 자그마하고 네모난 기계장치는 겉모습을 잃은 채 자신이 매미인 것 마냥 소리 내며 울고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순간 가짜 하늘 아래에 살면서 진짜일 리 없다 생각하지 못한 자신에 더 놀랐다. 반짝하고 순간적으로 반사되는 빛에 고개를 쭈욱 내밀어 자세히 살펴보니, 매미의 눈 쪽에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미니 렌즈가 삽입되어 있었다.

"미치겠네."

그는 가방에 있던 거뭇거뭇 한 손수건을 꺼내 매미였던 검은 조각들을 모아 담고 조심스레 감싸 덮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고는 이내 가방 안에 빠르게 집어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스레 가던 길의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피곤으로 잠식된 몸이지만,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는 분명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단단하고 또 묵직했다. 그의 가방 속에선 무엇인가 소리만 살아 맴-맴- 거리고 있었다.